2020-03-18 사순 제3주간 수요일 강론 / 김동희 모이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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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간 수요일 강론
2020년 3월 18일, 김동희 모이세 신부
“신부님, 신부님 세례명이 모세인가요, 모이세인가요? 같은 이름인 거죠?”
사람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하던 땅에서부터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게 한 위대한 주님의 도구였던 구약성경의 ‘모세’와 ‘모이세’는 같은 인물입니다. 이태리어로는 ‘모세’인데,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로는 ‘모이세’라 하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모이세’라고 불렸기에, 개인적으로는 ‘모이세’라는 이름이 더 친숙합니다. ‘모세’라는 이름은 사람들을 구석에 몰아넣고 공격하는 듯한 인상인데 반해, ‘모이세’라는 이름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의미도 있어 더 애착이 갑니다.
로마 유학시절 사람들이 제 이름을 물으면 한국 이름 대신 세례명인 ‘모세’라고 알려주곤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한결같이 보인 반응은 “무서워라!”라는 뜻의 “오 빠우라!”(Ho paura!)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십계명 판을 들고 머리에는 뿔이 솟은 모세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이 구약성경을 라틴어로 옮길 때 시나이산에서 모세의 변모를 드러내는 ‘얼굴이 빛나다’라는 단어를 소리가 비슷한 ‘뿔이 솟다’라는 단어와 착각하여 잘못 번역하였고, 또 예술가들이 그 오역된 것을 바탕으로 성화나 조각상을 만들면서부터 그런 오해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모세는 ‘이집트 탈출’(Exodus)과 더불어 ‘율법’(계명)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인물입니다. 오늘도 제1독서인 신명기에서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둔 백성들에게 율법의 규정과 법규들의 준수를 다짐받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비록 한계가 있는 것이기는 하였지만,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이 성숙한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제시된 하느님의 거룩한 지혜, 은총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체험한 백성이 그분의 소유로 살아갈 수 있도록 ‘빛’을 비춰준 것이었고, 이스라엘은 이에 응답해 하느님과 ‘옛 계약’(구약)을 맺고 살아갑니다.
율법의 근간인 십계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부터 10까지의 하나하나의 계명보다 ‘서언’에 해당되는 “나는 너희를 이집트 종살이하던 땅에서 이끌어낸 주 너희 하느님이다.”라는 표현이라 합니다.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고통을 굽어보시고, 그들의 조상들과의 약속(자손, 땅, 보호)을 기억하시어 놀라운 손길로 이끌어낸 그들의 충실하고 자비하신 구원자 ‘야훼 하느님’과의 계약이라는 사실이죠. 율법은 그저 무겁기만 한 짐과 멍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시간이 흐르면서 율법의 그 본래 주인이신 하느님과 그 정신은 퇴색되고, 문자 그대로의 준수에 집중하게 되면서 이스라엘 각자가 걸어야 할 그 길을 비추던 것이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도구가 되어버리지요. 이런 배경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율법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잊고,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하지 못 할 때, 율법은 지켜질 수 없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인은 자기 내부에서의 극심한 분열을 체험하게 됩니다. 거룩하고 좋은 율법을 빌미로 죄가 인간을 고발하고 상처 입히고 좌절케 하는 것이지요. 그래도 희망은 있습니다. 어제 복음의 만 탈렌트나 되는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주시는 자비와 용서의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떳떳한 시민으로 살게 될 줄을 알고 죽기까지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우리의 든든한 사랑의 흑기사 예수님이 있으니 말입니다.
자비와 용서를 만나면 새 살이 돋고, 새 힘이 솟습니다. 감사와 찬미가 터져 나오고 전에는 비틀거려 나아가지 못하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걷게 됩니다. 자기 안의 쓰라린 상처에 갇히지 않고 하느님과 이웃의 형제자매들을 섬기고, 세상 피조물과 환경을 돌보는 충직한 종으로 거듭 거듭 살아갈 것입니다.
모두 건강하시길 두 손 모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