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간 금요일]
2020년 03월 27일(금)
박준 야고보 신부
독서: 지혜 2,1ㄱ.12-22 / 복음: 요한 7,1-2.10.25-30
+ 찬미예수님
교우들을 뵙지 못하고 있음에도 오랜만에 강론을 쓰니 마치 오랜만에 ‘뵙는 듯한’ 느낌입니다. 미사 배정이 그렇게 되어 지난 주일에 뵙고 이제야 뵙습니다. 안녕하셨는지요?
제가 마두동에 부임하고 나서 알게 된 가곡이 하나 있습니다. 김광림 시인의 시에 변훈 작곡가가 곡을 붙인 ‘쥐’라는 노래입니다. 그 끝에 이러한 가사가 나옵니다. “남을 괴롭히는 것이/즐거운 세상을/살고 싶도록 죽고 싶어/죽고 싶도록 살고 싶어”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수많은 분들이 육체적일 뿐 아니라 정신적인 생사의 기로에서 고통스러워하고 계십니다.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이토록 힘든 때에, 오늘 복음을 통해 당신이 죽어 우리를 살리고자 하신 분의 위로를 느껴봅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지난 사순 4주일부터 이번 한 주간의 복음은 모두 요한복음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곧 하느님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사람을 살리셨던 그분이 곧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여러 표징과 수난을 통해 증언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 왕실 관리의 아들, 서른여덟 해 동안이나 앓던 사람까지. 곧 ‘생명’으로부터 멀리 있던 이들을 예수님이 모두 살리십니다. 그리고 어제의 복음은 사람을 살리시는 그 마음들 자체가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증언한다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오늘 복음에 이르러서는 그분의 죽음이 언급됩니다. 1독서의 지혜서 말씀처럼 악인들은 예수님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고자 계획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았다 느꼈나 봅니다. 자신들만이 알고 있다 자부했던 하느님에 대해 예수님께서 더욱 잘 말씀하시니 샘이 났나 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살리고자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그런 악인들에게 예수님은 맞서지 않으십니다. 단지 당신을 보내신 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29) 예수님은 당신을 보내신 분께서 사람을 살리는 분이심을 아셨습니다. 그 마음에 일치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는 것 또한 아셨습니다. 그렇기에 죽을 만큼 살고 싶은 이들, 그러나 살고자 하니 죽을 만큼 힘든 모든 이들을 당신의 죽음을 통해 살리고자 하십니다. 당신의 수난을 통해 하느님의 살리고자 하는 뜻이 이루어지도록 그저 그 때를 기다리십니다.
상대적으로 신성이 강조되는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때로 조금 차갑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간적인 감정의 표현이 절제되어 있기 때문인 듯 합니다. 그럼에도 오늘 복음의 예수님 모습은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를 주십니다. 그러한 예수님께 힘을 얻으면서 우리 자신 또한 누군가를 살리는 사람이 될지 죽이는 사람이 될지 성찰해 봅니다.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그 마음과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 담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을 향한 시기, 질투 혹은 나만을 위한 이기심으로 인해 오히려 하느님의 따뜻한 마음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여 부활을 함께 맞이함으로써 하느님의 살리시는 마음이 다시금 드러날 수 있기를 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