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4 사순 제5주간 토요일 강론 / 박준 야고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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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간 화요일]
2020년 03월 31일(화)
박준 야고보 신부
독서: 에제 37,21ㄴ-28 / 복음: 요한 11,45-56
찬미예수님. 오늘은 사순 제5주간 토요일입니다. 지난 한 주간은 개인적으로 코로나19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이 피부에 와 닿는 시간이었습니다. 가까운 지역에 있는 성모병원에서 집단 확진자가 발생하고, 서울과 의정부 교구 모두 미사 중단을 무기한 연장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미사 중단이 발표될 때만큼이나 이 사태는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로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되는 성지주일을 하루 앞둔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수난은 남의 일이 아닌 바로 ‘나의 구원’임을 생각해봅니다.
오늘 복음은 전반적으로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논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피신하시며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과연 축제에 나타나실 것인가에 대해 수군거립니다. 이러한 긴장감 속에서 복음의 마지막은 나에게 던지는 질문처럼 느껴집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요한 11,56)
그분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이 군중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혹은 나에게는 어떠한 의미일까? 생각해 봅니다. 이 축제에 참여하심으로써 수난이 시작될 것을 아는 나의 관점에서 이 질문은 ‘예수님의 죽음은 나에게 어떠한 의미인가?’와 같습니다. 마치 중세시대 광장에서 벌어지던 공개처형을 하나의 구경거리처럼 여기던 것과 같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그러한 일인가? 혹은 오늘 독서의 말씀처럼 내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이 되시는 그러한 일인가?(참조: 에제 37,23)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드라마를 하나 소개하고 싶습니다. 배우 김태희씨가 주연을 맡아 화재가 된 ‘하이바이, 마마’라는 드라마입니다. ‘귀신’을 소재로 한 다소 유치할 수 있는 판타지물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드라마의 주제는 귀신 혹은 퇴마와 같은 것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드라마는 현재 12회까지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예기치 못한 죽음을 남의 일로만 생각하며 오만하게 살았던 삶에 대한 반성’ ‘생전에 더 잘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아픔’ ‘삶이 다시 한 번 주어진다면...’과 같은 화두들을 던지면서 시청자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듭니다.
뜬금없이 드라마를 소개한 이유는 코로나 사태와 이 드라마의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한계’와 ‘나약함’을 깨닫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나 또한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존재임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일로 와 닿기 위해서는 우선 죽음 자체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사실 동시대 사람들의 죽음조차 때로는 그저 남의 일로 느껴지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축제에 오심으로써 받아들이신 그 죽음이 나와 늘 가까이에 있는 바로 그 죽음임을 기억해 본다면 이는 그저 남의 일이 아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받아들이셨던 죽음은 내가 언젠가 마주할 그 죽음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을 드러내는 그러한 죽음과는 전혀 다른 죽음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 사람을, 사람과 사람을 하나로 묶어줄 축제를 위한 죽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은 인간을 허무로 돌아가게 하는 그러한 죽음이 아닌, 어제 주임신부님의 강론 말씀처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영원하고 무한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일, 그리고 성주간을 통해 예수님의 지독한 수난을 함께 하게 됩니다. 단순한 고통을 넘어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사랑에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청합니다. 사랑의 축제를 생각하며, 이 수난 또한 나의 일로 함께 참여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