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성야 강론
2020년 4월 12일, 김동희 모이세 신부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교우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그 승리의 기쁨을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의 무덤 속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길이 참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구원의 길이라는 보증이며 승리의 선언이라 하겠습니다.
1.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신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부활을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라 말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랑의 삶, 그리고 십자가 수난까지 모두 그 의미를 잃기 때문입니다. 곧 그 모든 것이 헛고생, 아무 쓸 데 없는 일로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에 대한 환대와 용서도, 십자가 위에서의 위대한 용서의 기도도 모두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저 진리와 사랑을 꿈꾸며 부르짖다가 살해당한 이상주의자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양희은 님의 노래 가운데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라는 꼭이 있습니다.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려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려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저는 올해 성금요일에 이 노래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힘껏 사랑하다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주님이 돌아가신 날에 말입니다.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려”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예수님의 부활, 사랑이 승리한다는 그 믿음과 희망이 없다면 사랑만큼 쓸쓸하고 허망한 것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부활이야말로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힘입니다. 그 바보 같아 보이는 십자가의 길에 빛을 밝혀주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비단 2000년 전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과거에 완료된 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 부활하신, 그래서 살아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했던 삶의 자리인 갈릴래아로 다시 돌아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말씀 안에서, 삶 속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 체험은 막달라 마리아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2. 그러나 아직 우리의 온전한 부활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 감염병의 확산 방지를 위해 우리 교회는 신자들과 함께하는 미사를 오래도록 중지하였고, 언제 재개될 런지 기약하기 어려운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학자들은 코로나19 이후 우리들의 삶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으리라 예상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고립된 개인주의가 심화되고,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는 오프라인 모임보다 SNS나 인터넷 환경을 통한 온라인 모임이 광범위하게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습니다. 감염병에 대한 두려움에 활동을 접고 사회적 거리를 두고 지내다 보니 서로 간의 마음의 거리도 멀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서히 용기를 내고 부활의 기지개를 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가수 임재범 님의 노래 가운데 ‘비상’이라는 곡도 그 가사가 의미심장합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 순간이 있지
그렇지만 나는 제자리로 오지 못했어/ 되돌아 나오는 길을 모르니
너무 많은 생각과 너무 많은 걱정에 온통 내 자신을 가둬두었지
이젠 이런 내 모습 나조차 불안해 보여/ 어디부터 시작할지 몰라서
나도 세상에 나가고 싶어 당당히 내 꿈들을 보여줘야 해.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날고 싶어
감당할 수 없어서 버려둔 그 모든 건/ 나를 기다리지 않고 떠났지
그렇게 많은 걸 잃었지만 후회는 없어/ 그래서 더 멀리 갈 수 있다면
상처 받는 것보단 혼자를 택한 거지/ 고독이 꼭 나쁜 것은 아니야
외로움은 나에게 누구도 말하지 않을/ 소중한 걸 깨닫게 했으니까
이젠 세상에 나갈 수 있어/ 당당히 내 꿈들을 보여줄 거야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다시 새롭게 시작할거야/ 더 이상 아무것도 피하지 않아
이 세상 견뎌낼 그 힘이 돼줄 거야/ 힘겨웠던 방황은
살아가다보면 정말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 어려운 시간(방황)들을 만나게 됩니다. 마음속에서 상처와 원망, 깊은 절망이 불쑥불쑥 자라나 도움의 손길과 위로의 말도 모두 거절하고 뒷걸음질 쳐 안으로만 향하다보니 “되돌아나가는 길을” 모르게 된 경우입니다. 커다란 어려움을 겪은 것도 아닌데 갱년기 등의 신체적인 변화 등으로 인해 부지불식간에 홀로 유폐되고 고립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도 합니다.
성 금요일 어제 아침에 저는 우리 본당의 김 말지나 원장 수녀님으로부터 “금요일 아침에 이 학생이 감동을 주네요.”라는 카톡 메시지와 함께 한 장의 사진을 전송 받았습니다. 성수동 성당의 한 학생이 성당 문이 닫혀 있으니 길가에서 성당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의 사진이었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서 저는 고등학교 시절 기도와 성체조배를 강조하셨던 제 출신 본당의 신부님 한 분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아일랜드 신부님이셨는데 무척이나 호랑이 신부님이셨지만 저희 학생들에게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게 해 준 분입니다. 신부님은 성체조배를 무척이나 자주 강조하셨습니다. “성당 앞을 지나갈 때면 꼭 들러서 잠깐만이라도 예수님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가세요.” 그 말씀에 저희 성당 동기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자주 성당에 들러 기도하곤 하였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도 들르고,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들르고……. 그러다보니 평일미사에도 나가게 되었는데, 고3 수험생 때에도 간혹 힘이 들 때면 평일미사에 참석했던 기억이 납니다.
평화방송이나 유투브를 통해 중계되는 미사를 보며 어렵게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단체 모임이나 활동도 못하게 되니 신앙도 소극적으로 변해가시지요? 이번 부활을 맞아 우리 모두 새롭게 신앙의 용기를 내보자고 초대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오전 10시~12시, 오후 2시~5시에만 개인적으로 기도하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성당 대성전만을 개방하고 있지만 사정이 점차 나아지겠지요. 성당을 지나는 길에 꼭 들러 기도합시다. 개인 승용차나 버스 등으로 성당 앞 사거리를 지날 때면 우리 성당을 바라보며 기도합시다. 우리 각자 스스로를 주님 안에서 일으켜 세웁시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당당히 세상으로, 이웃 형제자매들의 곁으로 나아갈 용기와 힘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