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4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강론 / 박준 야고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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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2020년 04월 14일(화)
박준 야고보 신부
독서: 사도 2,36-41 / 복음: 요한 20,11-18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예수 부활 하셨네~ 그전에 사도께 말씀하심과 같이~” 여느 때처럼 부활성가를 흥얼거리며 잔치의 분위기를 내지 못하니 다소 기쁨도 덜 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부활은 분명 서로 축하하며 기쁨을 나누는 축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생명을 새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의 사건을 오늘날 재현하고 기념함으로써, 그 동안 당연한 것으로 느끼던 나의 생명을 새롭게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내가 살아있음을, 하느님께 사랑을 받으며 그분의 영과 함께 기쁘게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이 기쁨을 8일 동안 만끽하는 부활 팔일 축제 중에 오늘은, 나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요한 20,16) 이름을 불러주시는 예수님에게서 ‘창조’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지난 부활 성야 미사 때 제 1독서이기도 했던 창세기의 말씀에서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던 모든 것들을 존재하는 것으로 불러내십니다. 사람은 특별히 당신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 사람(아담)이라는 이름을 지어 불러주십니다.
사실 지난 부활 성야 때의 다른 독서들 또한 모두 하느님께서 세상을 살리시고, 나를 살리시는 내용들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또한 그러한 마음이었을까요? 자신의 전부였던 스승께서 돌아가신 것도 모자라 그 시신마저 사라지니,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듯 좌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을 다시 불러 주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를 살리신 분이 살아계심을, 그래서 나도 살게 되었음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는 이유를 여기에서 생각해 봅니다. 나를 살리신 분에 의해 나는 지금도 소중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 동안 나의 죄에 묻혀, 일상에 묻혀 사라지고 잊혀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그것이 나에게 드러났습니다. 되살아나신 그 분께서 태초에 그러하셨던 것처럼 나의 이름을 불러주심으로써 묻혀있던 것을 다시 드러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축하의 인사를 나누며 기뻐합니다.
내일은 제 21대 국회의원 선거일입니다. 정치(政治)가 무엇인지 잘은 모르지만, 두 한자어 모두 ‘다스림’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스림’이란 하느님께서 우리를 되살리셨던 그 마음으로 우리도 이웃과 다른 피조물을 보살피는 일입니다.(참조: 창세 1,28) 부활 팔일 축제 중에 있는 이 의미있는 날을 통해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온 땅에 퍼지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