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간 토요일 강론
2020년 5월 9일, 김동희 모이세 신부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내리는구나.”(욥 19,25-27)
욥기의 일부분입니다. 까닭모를 엄청난 재앙과 처참한 질병의 고통을 겪으면서, 또 그를 죄인 취급하는 주변 사람들의 구구한 억측에 시달리면서 욥이 토해낸 말입니다. 이렇게 고통 속에 죽게 되는 후에라도 꼭 하느님을 뵙고 물어보고 싶다는 하소연이지요. 부조리한 세상에서 희망과 답을 찾지 못한 이들은 이렇게 간장이 녹아내리는 애틋함으로 하느님 뵙기를 갈망해 왔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생의 숨은 곡절을 밝혀 한 세상 의미 있게 살다가고자 하는 이들도 자신을 내신 하느님을 보고자 하였지요.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뵙기만 하면 그 모든 신비가 풀릴 터이니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사도 필립보의 이러한 청원도 같은 맥락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예수님이 아니시라면 뉘 있어 이러한 광오 (狂傲)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자비하신 하느님의 아이콘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느님이 그저 두려운 분이 아니라 사랑 지극한 우리의 아버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한평생은 사실 이 자비하신 하느님을 증거하는 외길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로 말미암아 동시에 알게 되는 엄청난 진리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곁에 다가와 사람이 되시고, 또 우리네 가여운 인생들을 위해 기꺼이 죽기를 원하시기까지 하셨으니 우리 하나하나의 값어치기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허무로 끝나는 덧없는 인생들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목숨 바쳐 사랑한, 참으로 소중한 당신, 사랑의 파트너들입니다.
하느님의 신비와 인간의 신비, 그것을 믿으십니까? 이 믿음의 유무가 우리 인생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