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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6주간 화요일 강론

 

 

2020519, 김동희 모이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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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보이는 예수님이 떠나시고 보이지 않는 성령이 오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우리들에게 더 이롭다 하십니다.

 

 

서울대교구 시절,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대군(파트리치오) 신부님의 지도로 사제 피정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김 신부님은 사제생활 중에 병으로 시력을 잃으셨습니다. 제가 배정받은 방이 김 신부님의 방 근처여서 식당이나 성당, 강의실을 갈 때 제가 자주 신부님을 모신 일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벽면을 따라 찬찬히 걸으시며 계단도 잘 오르내리셨지요. 창이 많은 복도 쪽을 걷노라면 오늘은 햇볕이 좋네, 오늘 아침엔 바람이 많이 불고 추운가 보네 하고 말씀하셨지요. 눈이 보이지 않으니 계단의 숫자, 몇 보 걸으면 통로가 우측으로 휘어진다, 거기에서 몇 보 더 걸으면 내 숙소다 하는 것들을 다 기억하셨지요. 눈 아닌 피부나 청각을 이용해 날씨 변화 등을 다 감지하셨지요. 이렇듯 눈은 정말 중요한 감각기관이지만 거기 너무 의존하다 보면 다른 감각기관들은 원활하게 사용되지 못하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떠난 뒤에야 그 사람의 소중함을 알 수 있게 되기도 합니다. 함께 있을 때에는 당연하게 여겨 잘 모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구관이 명관!’이란 말이 나왔을까요? 함께 있을 때보다 오히려 부재’(不在)할 때 그의 진면목이 보입니다. 그가 했던 이야기의 의미가 되새겨지거나 그와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합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당신이 떠나시는 것이 우리에게 이롭다 하십니다.

 

 

그 빈자리에 보호자성령이 오실 터인데, 그분은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드러내고 바로잡아 주실 것이라 하십니다. 그런데 말마디만 헤아려서는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성령께서 해주신다니 성령께 맡기고 저는 여기서 강론을 접어야 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간단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나 자신의 숨은 진실이 보입니다. 나의 약함과 그로 인한 과오들이 고통스럽게 양심을 파고듭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그들의 위선을 속속들이 꿰뚫어 알고 있는 빛이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선량함을 내세워 거절하였지요.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들에게 불편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치워버리기까지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 있어 이전의 그 허다한 죄들은 하등 문제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과 약함을 알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알량한 거룩함과 선함을 내새워 세상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완고함과 불신을 드러낸 것이죠. 정말 참된, 무서운 죄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진실의 영인 동시에 사랑의 영이십니다. 그분은 심위일체의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악한 영도, 두려움의 영도 우리 내부에서 죄를 바라보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과 다른 것은 두려움의 영은 자기 죄와 자신만 바라보다 사람을 병들게 하거나 더 깊은 어둠에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지만 성령은 그처럼 죄를 밝히면서도 우리 내부에서 내 죄로 인해 상처입은 나의 이웃들을 바라보게 하고, 더 나아가 나를 용서하고 구원하러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쳐다보고 나아가게 한다는 점이지요. 성령은 죄를 보게 하시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죄를 넘어설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심판과 연관해서는 이미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심판받았다는 것을 성령께서 알려주신다 합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 세상의 권력자가 예수님을 유죄로 판결하고 십자가 죽음으로 심판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길에서 자신들의 무지와 완고함과 사나운 폭력을 그대로 드러내며 도리어 이미 심판받았다는 것이지요.

 

 

끝으로 의로움과 관련해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고 우리가 더 이상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 의로움(정의)라 하십니다. 이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는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십자가 길에서 드러나듯 하느님은 자비로써 심판하십니다. 자신의 무지와 죄악 가운데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통해 자신의 과오가 씻기고 그 허물이 벗겨졌음을 체험한 이들은 고백합니다. ‘하느님 홀로 하느님이시고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고 나는 그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이 제자리 찾기가 정의일 것입니다. 이때 어둠의 행위들은 부끄러운 일로 남고, 감사한 일들은 감사한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순박하면서도 똘똘한 주님의 어린아이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그 어린이 같은 마음에서 감사와 찬미가 터져 나오게 해주십니다. 더 많은 이들에게 이러한 성령강림이 이루어지기를, 무디어진 우리들에게는 거듭거듭 새로운 성령강림이 도래하길 기도합니다. 오소서 성령님!

 

김동희 사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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