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승천 대축일 강론
2020년 5월 24일, 김동희 모이세 신부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자주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흩어졌던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리고 한데 모여 당신께서 보내시기로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도록 당부하신 후 지상에서의 여정을 모두 마치시고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전례 – 위험스러운 기억!
우리는 지금 미사 전례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전례’는 개인이 아니라 구원된 백성인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사랑의 역사를 부단히 ‘기억’하며 하느님께 찬미와 흠숭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례적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과거의 구원사건과 말씀이 생생하게 현재화되고 지금의 나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2000년 동안 쉼 없이 미사성제를 봉헌해 온 까닭이 이것입니다. 이는 신앙인인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우리 삶의 자양분이 되어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는 데에 우리를 투신케 합니다. 그래서 전례는 ‘위험스러운 기억’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특별히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며 예수님의 지상생활, 우리 주님의 구원 역사를 함께 기억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느님이며 참 사람이신 분’으로,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고 고백합니다.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제멋대로 오해하고, 또 자신과 서로를 오해하고 있기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전해주고자 하신 것의 핵심은 ‘압바 하느님’(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알고 나면 그분이 사랑하시는 나/우리의 신비가 보입니다. 나/우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하느님의 귀염둥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지상에서 예수님은 드러나지 않는 30년의 세월을 나자렛의 가정에서 평범해 보이지만 실은 비범한 사랑으로 사셨습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모범(‘으뜸가는 길’: 1코린 13장)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부모님과 가족과 이웃들과 더불어 그저 사랑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 공생활의 핵심은 용서와 자비, 기쁨과 평화의 하느님 나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고 시기해도 그분은 용서하고 사랑하고 돌보기를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이것입니다. 참된 사랑에 대한 오해와 시기!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에서까지,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하고 돌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한국의 많은 유사종교들에서는 예수님을 실패자로 바라봅니다. 세례자 요한이 실패하여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이 다시금 실패하였으니 재림 예수인 자신이 왔노라고 선전한다.
거짓말입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실패자가 아니십니다. 성부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서 일으키시어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죽음과 멸망으로 끝나지 않으며, 죽음의 힘은 결코 사랑을 완전히 짓눌러 없앨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보여주셨습니다. 죽기까지 사랑하고 돌보신 예수님께서 승리하셨다고 예수님의 손을 번쩍 들어 주신 것이지요. 그래서 그분은 지금도 살아계시며, 용서하고 사랑하고 돌보십니다.
‘승천’의 두 가지 의미
고통을 무릅쓰는 한결같은 사랑, 십자가는 부활에 이르는 참된 길입니다.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들은 그대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그분의 승천을 ‘기억’합니다. 승천의 두 가지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승천은 이제 그분이 지상 사명을 완수하시고 당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감을 의미합니다. 대신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모범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아버지와 당신 사이를 관통하는 사랑 곧 성령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육신을 취하신 예수님은 떠나가시지만, 성령을 통해 온갖 한계를 벗어나 세상 끝까지 모든 이들을 비추시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부재하신 빈 공간, 역사의 무대에서 우리들 하나하나가 성령과 협력하며 나 자신의 역사, 우리들의 아름다운 사랑의 역사를 만들라는 초대입니다. 우리들이 사랑의 길을 가기 위해 애쓰고 수고하는 삶을 살아가는 어느 날 그분은 홀연히 오셔서 우리들의 모든 노고를 받아들이시며 그 수고와 사랑을 완성시켜 주실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참 사람이신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들의 영원한 운명을 앞당겨 보여줍니다. 우리 모두는 지상에서 한평생 수고하다가 초래하게 자신의 운명을 마감해야만 하는 비참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영광의 신비 4단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하늘에 불러올리심을 묵상합시다.”에 나오는 성모님처럼 우리 역시 죽음의 문턱을 넘어 하늘 곧 하느님의 곁으로 오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승천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신앙의 보증입니다.
너무나 많은 젊은이들이 실망하고 좌절하는 요즈음입니다. 이는 비단 우리 한국사회의 문제만은 아닌 듯합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으나 그것을 누리기 위한 진입 장벽이 높아지다 보니 직장을 구하고, 혼인할 짝을 구하는 데 있어서도 세상에 봉사하고, 사랑을 함께 나누려 하기보다는 안정된 현세의 삶을 보장해 줄 것이 무엇인지, 또 누구인지 끊임없이 자신만의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안타까워하십니다.
코로나19를 겪으며 우리 인류는 세상의 피조물과 이웃들을 나 몰라라 하는 지금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이웃은 나의 평생의 안전과 기쁨을 위해 내가 이용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사랑 안에서 성장해야 할 동료이며 우리들의 아름다운 만남의 장입니다. 계산기를 믿지 말고, 용기 있게 사랑의 길로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전례는 위험스러운 기억”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승리하신 사랑의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당신 뒤를 따르도록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하느님의 지혜, 그 어리석은 사랑을 보다 더 많은 이들이 체험하고 믿고 희망하며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