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강론
2020년 6월 3일, 김동희 모이세 신부
당당한 그리스도인은 ‘지혜’와 ‘용기’의 덕을 지닌 사람들!
어제는 우리 본당 구역장 반장님들의 월례모임이 있었다. 아마도 3개월 만에 열린 모임이라 생각된다. 코로나19의 그칠 줄 모르는 위험 가운데 처해 있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지난 사순시기에 교구에서 준비해주셨던 유투브 사순특강 가운데 최대한 신부님의 ‘당당한 그리스도인’을 함께 보았다. 대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의 생활지도 및 지성적 양성을 담당하고 있는 최 신부님은 인간학과 철학의 기초 위에서 이를 참으로 조리 있게 또 편안하게 설명해 주셨다.
내용을 요약하며 오늘 복음과 연관시켜 좀 더 첨언해 보겠다. 당당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지혜’와 ‘용기’의 덕이 필요하다. 먼저 ‘용기’(fortitudo)는 감정의 격정적 분출이 아니라, 진리와 선함에 바탕을 둔 고귀한 가치를 위해 굴하지 않고 나아가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우간다의 젊은 순교자들, 가롤로 르왕가와 그 동료들에게서 우리는 그 ‘용덕’을 발견하게 된다.
당당하다는 것은 안하무인격의 오만방자함과는 다르다. 지혜와 그에 따른 확신이 함께할 때 참된 용기라 할 수 있다. 지혜의 덕을 가리키는 라틴어는 ‘프루덴시아’(prudentia)이다. 이는 현명함, 사려 깊음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지혜는 단순히 축적된 지식의 양의 많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덕이다. (주역의 ‘時中’과 비슷하다.)
현명함의 덕을 이루는 것들 가운데 ‘판단중지’(epoche)라는 것이 있다. 인간 인식의 한계 또는 주어진 정보나 경험의 부족으로 인해 인식과 판단에 어려움이 있다면 그 문제에 괄호를 치고 기다리는 모습을 말한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은 ‘부활은 없다’고 단정 짓고 예수님께 억지스런 질문을 던진다. 이스라엘의 전통에 따라 일곱 형제가 후사를 얻기 위해 한 여자를 모두 아내로 삼았다 했을 때 부활이 있으면 곤란하다, 그러니 부활이 없어야 한다는 식이다. 사실 죽음 이후의 문제 곧 부활은 우리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그 너머의 것이다.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성적으로 만이라도 괄호를 쳐 두는 것이 정직한 일이다.
부활이 부정되고 현세만이 의미를 획득한다면 어떻게 될까?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이 범주적 인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감각계와 그것이 미치지 못하는 ‘물(物) 자체’를 구분하였다. 물 자체란 어떤 것의 본질과 존재로서 형이상학 또는 신과 종교의 영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하겠다. 형이상학과 종교에 대해서는 괄호를 친 셈이다. 그런데 이후 그는 ‘정언 명령’(언제 어디서나 보편성과 그 규범에 따라 행위하라) 등의 도덕적 삶을 논하면서 모든 도덕적 행위의 배후요 근본 토대로서 신을 요청한다. 신이 없다면 도덕적 삶이란 것이 도무지 지탱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부활이 없고 그래서 우리의 삶이 현세뿐이라면 어차피 찰라와 같은 인생을 사는 내가 굳이 도덕적이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남 눈치 볼 것 없이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한 세상 잘 즐기다 가면 그뿐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극도의 소비주의와 과도한 개인주의의 바탕에는 필경 현세만을 바라보는 문화와 가치관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나 실제 내 삶의 모습에서 부활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각자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