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기념일]
2020년 06월 13일(토)
박준 야고보 신부
독서: 1열왕 19,19-21 / 복음: 마태 5,33-37
찬미예수님. 오늘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기념일입니다. 축일을 맞으신 분들 축하드립니다.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은 ‘잃어버린 물건이나 사람을 찾아주는 수호성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길을 잃은 저희들을 위해서 안토니오 성인께 전구를 청합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우리는 마태오 복음서의 산상설교 부분을 복음으로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충분히 당신의 계명을 지킬 수 있음을 믿고 맡기신다는 느낌이 듭니다.
오늘의 복음에서는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묵상’에도 잘 설명되어 있듯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 단어의 본 뜻은 ‘절대자이신 하느님을 근거로 자신이 진실하다고 주장하다.’라고 합니다. 조금은 차이가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더 자주 사용하는 개념으로는 ‘장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체험과 지식만을 바탕으로 무언가에 대해 장담합니다. 그것이 선한 신념에 대한 것이면 다행이지만 때로는 다른 사람의 성격이나 처지에 대해 판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내가 옳은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진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유행이었던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의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그런데 주인공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의사는 장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수술이 반드시 잘 될 거라는 위로나, 그 반대로 사실만을 지적하여 낙심하게 만드는 일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의사로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의사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맹세는 그 방향이 반대이어야 합니다. 나를 중심으로, 나의 사욕을 위해서 진리를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리에 가까워지고자 다가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영어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Let your ‘Yes’ mean ‘Yes,’ and your ‘No’ mean ‘No.’ 이는 “네가 말한 ‘예’는 ‘예’가 되게 하고, ‘아니오’는 ‘아니오’가 되게 하여라.”라고 조금 거칠지만 직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나를 중심으로 하느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중심으로 내가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힘들더라도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하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세례 서약을 하고 혼인 서약을 합니다. 혹은 수도 서원이나 서품 서약을 합니다. 사제 서품식 때에 하는 서약의 구조는 주교님께서 질문을 하시고 대상자들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응답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부제 서품과 사제 서품 모두 공통적으로 마지막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향해서 내가 움직이는 것이지만 그 조차도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번 한 주간 우리에게 주신 여러 가르침들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그러한 은총을 이미 받았음을 믿음으로써 지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