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일(가) 강론
2020년 6월 21일, 김동희 모이세 신부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찬미 예수님!
성경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부분만이 아닌 전체 그리고 맥락을 살피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 10장의 중후반부에 해당됩니다. 소제목은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26-33절)입니다. 그 앞뒤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10,1-4 열두 제자를 뽑으시다
10,5-13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10,16-25 박해를 각오하여라
10,34-36 나는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왔다
10,37-39 버림과 따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 가운데 열둘을 가까이 부르시어 사도로 삼으시며 당신의 권한과 능력을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고는 이들을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하십니다. 전대에 어떤 돈도 지니지 말며,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 하십니다. 오직 그들을 파견하는 당신께만 의지하라는 뜻이지요. 그러면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16절)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파견되어 맞닥뜨려야 하는 세상이 만만치 않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말입니다. 이러한 위기감은 다음의 말씀에서 최고조에 달합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마귀들의 우두머리)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24-25절)
오늘 복음 말씀은 바로 이러한 ‘위기감 속에서의 파견’을 배경으로 합니다. 복음 말씀을 자세히 되새겨보기에 앞서 예화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떤 이가 죽어서 하느님 앞에 갔다. 그는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주님, 저는 세상에서 살인이나 강도, 도둑질,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나 거짓말 등을 하지 않고 흠 없이 살았습니다.
여기 제 손을 보십시오. 이렇게 깨끗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네, 그렇습니까. 그런데 빈손이지 않습니까?”
- 프란치스코 교황의 예화 ‘빈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어 세상에 내보내신 목적은 이것도 안하고 저것도 안하고, 그래서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게 살다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아니라면,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하면서 사랑 안에서 성장하며 그 열매를 거두어 오라는 것이지요. 배는 항구에 묶어두면 안전하지만, 배는 항구에 묶어두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난바다에 나아가 고기도 잡고, 망망대해를 헤쳐 나가며 사람들을 이 나라 저 나라로 실어 나르라고 만든 것이지요.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와 더불어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심고 자라게 하라는 사명을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사셨던 분입니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아버지와 대화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그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들을 제자로 불러 세상에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사실 예수님 스스로 당신의 흉중에 품었던 신념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금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것이지요.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라는 표현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모든 것을 정해진 제자리로 돌리시는 ‘사필귀정의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라는 고백 그대로이죠. 지금 당장은 세상과 세상 안에서 힘 있는 이들이 대단해 보여도 모든 것은 밝혀지고 하느님이 정한 이치로 되돌아가리라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사실 눈앞의 사람들은 무척이나 두렵습니다. 그들 앞에 나서서 내 얘기를 하는 것도 두렵고, 또 힐난하는 눈짓이나 비난, 부정적인 뒷담화 등을 접하게 되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권한과 한계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밝혀주십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육신을 죽일 수 있는 이들입니다.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이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려면 오히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쥐고 계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접하고 강론을 준비하면서 저는 우리 가톨릭교회와 본당의 봉사자들에게 제 마음이 깊이 흘러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들이야 말로 참으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마태 11,28) 이들입니다. 그들은 교회와 본당 공동체 안에서 책임을 맡아 자신의 귀한 시간을 내고 심지어 가진 것 털어 넣으며 봉사합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교우들의 무관심한 냉대, 비난 섞인 뒷담화, 당연하게 여기며 봉사를 요구하는 모습들로 인해 지치고 상처 입은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안의 이러한 풍조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밖으로 나와 봉사하지 않는 이들, 그들은 스스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시시콜콜히 남들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에 몰두한다고 말입니다. “나대지 마라!” 하며, 봉사하고 활동하는 이들을 주저앉히는 패배감의 문화는 쇄신되어야 합니다. 칭찬하고 격려하며 서로를 일으켜 세워도 힘들 터인데 이런 저평가와 좌절케 하는 문화 속에 어찌 기쁘게 봉사할 수 있으며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본당 소공동체의 지역장 구역장 반장님들, 크고 작은 단체에서 책임을 맡아 수행하시는 분들, 본당의 총회장님과 사목협의회의 모든 봉사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환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수고수난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를 알고 계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십니다. 용기를 잃지 마십시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마귀들의 우두머리)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24-25절)
“그분(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