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간 월요일]
2020년 06월 22일(월)
박준 야고보 신부
독서: 2열왕 17,5-8.13-15ㄱ.18 / 복음: 마태 7,1-5
찬미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12주간 월요일입니다.
저는 집중력이 좋지 않은 편입니다. 흔히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거라고 하시던데 저는 엉덩이가 가볍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에 쉽게 신경이 분산됩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가끔 도움이 되는 오지랖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은 좋습니다.
예를 들어 몇 주 전 월요일 점심에 적당한 식당을 찾아 돌아다니던 중 저처럼 마땅한 식당을 못 찾고 헤매고 있는 몇몇 아저씨들을 횡단보도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작업복을 입고 계신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 ‘좀 더 내려가시면 뼈다귀집 있어요’하고 알려드렸습니다. 국밥집을 찾고 계셨기 때문이지요.
오지랖이라는 것이 이렇게 좋게 쓰이면 괜찮은데 나쁘게 쓰일 때도 있습니다. 남을 내 기준에서 규정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학생 때부터 자주 고해성사의 주제가 되었던 것은 겉모습으로만 사람의 마음까지 판단하고 단죄하는 문제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마태 7,4)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은 남을 내 기준에서 규정하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냥 점일 수도 있는데 “저 눈 속에 있는 것은 분명 티이야”라고 규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내 눈에 있는 들보 때문에 그것이 티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본래 존재를 규정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습니다. 창세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만 당신의 말씀을 통해 하늘을 하늘로, 땅을 땅으로, 새는 새로 사람은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각자의 고유한 모습에 따라 귀하게 살아가도록 이끄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형제의 모습을 “티끌”로 규정하여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같은 피조물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본래 모습을 찾는 것과, 형제의 본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비록 눈에서 들보를 빼 내는 일 만큼이나 힘들고 아픈 과정이어도 우리는 예수님의 도움에 기대어 그렇게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