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4 연중 제9주간 목요일 강론 / 이규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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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9주간 목요일]
찬미 예수님!
신명기 6장의 4절과 5절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대목을 ‘쉐마'라고 합니다. 쉐마는 ‘들어라'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꼭 이것을 외웁니다. 이것은 그들의 기도이며 또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쉐마'를 적어서 손에 매달고 다니기도 하며 이마에 붙이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만큼 그들은 하느님의 법을 사랑하면서 하느님의 법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많은 율법이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613조목이며 이 중에 무엇을 ‘하라'는 명령 248조목,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령이 365조목입니다. 율법이 이처럼 너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다 지킬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한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오늘 율법학자가 체면 불구하고 예수님께 와서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항상 명쾌합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율법의 613조목을 짜고 또 짜서 걸러 낸다면 바로 ‘사랑'이라는 두 글자가 남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인간 세상의 신앙인들에게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앞면은 하느님 사랑이요 뒷면에는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별개의 얼굴을 가진 듯이 보이지만 근원은 하나며 또한 내용도 결국은 같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애 자체가 사랑이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을 떠나서는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사랑 밖에서는 무엇을 행하신 적도 없으십니다. 사랑으로 오셨다가 사랑으로 사셨으며 그리고 사랑으로 가셨습니다. 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고 또 차원이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습니다. 여기서 이웃 사랑이라는 것도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야 가치가 있지 이해타산이 결부된 사랑, 조건이 달린 사랑은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부자요 아무리 큰 학식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가 사랑을 못하고 있고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받는 것도 기쁘지만 사랑을 하고 베푸는 것은 더 기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나 누구를 미워할 때나 주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도 그 사람을 사랑하기를 하느님은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을 할 때 우리는 바로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이것이 사랑받는 길이요 또 하느님을 만나는 비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