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18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강론 / 박준 야고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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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간 목요일]
2020년 06월 18일(목)
박준 야고보 신부
독서: 집회 48,1-14 / 복음: 마태 6,7-15
우리는 흔히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쉽게 표현합니다. 그런데 막상 이 말이 쉬운 것도 아닙니다. ‘대화’라는 단어는 영어로 ‘다이아로그(dialogue)’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그리스어 ‘디아-로고스(δια-λογος)’에서 유래합니다. 비슷하게 생긴 단어로 ‘독백’이라는 뜻의 ‘모노로그(monologu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두 단어의 공통점은 모두 ‘말’을 뜻하는 ‘로고스(λογος)’와 그 앞에 접두어가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 ‘독백’이라는 단어에 붙은 모노(mono-)라는 접두어가 ‘하나’ 혹은 ‘홀로’라는 뜻이니까, ‘대화’라는 단어에 붙은 ‘디아(dia-)’라는 접두어는 ‘둘’이라는 의미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둘’을 뜻하는 단어는 우리가 흔히 듣는 ‘듀오(duo-)’이고 ‘디아(dia-)’의 뜻은 ‘통해서(through)’입니다.
결론적으로 ‘대화’라는 것은 단순히 둘 이상의 말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그 참여자가 몇 명이든 서로의 뜻이 서로 통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가끔 대화를 하다보면 열심히 자신의 말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성향의 사람 둘이 대화를 하면 사실 그건 대화라기보다 두 가지의 독백을 하나로 합쳐놓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하느님과의 대화’가 더욱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삶에서 하느님께 혹은 각자가 믿는 그 어떤 절대자에게 일방적으로 독백을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얼마전 티모테오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신천지와 같은 종교 집단에 수액의 봉헌금을 내면서까지 다니는 신도들의 종교적인 만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문득 그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그만큼의 봉헌금을 내는 행위 자체를 스스로는 훌륭한 ‘기도’로 느끼고 그럼으로써 어떠한 신적인 보상을 받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신천지 신도들뿐만 아니라 우리 대부분이 지닌 기복적 신앙심 때문에 하느님과의 대화가 일방통행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추고자 노력하면서 나의 것을 봉헌한다면 서로 통하겠지만, 이 만큼의 돈으로 나의 복을 ‘구매한다’는 마음으로 하는 봉헌은 분명 일방적인 행위입니다.
이처럼 연약한 인간에게 하느님과의 뜻이 서로 통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그것을 가능케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으며, 가장 쉬우면서 위대한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마 교우분들께도 묵상을 할 때마다 늘 새롭게 다가오리라 생각합니다. 일곱 개의 청원들이 그때그때 나의 마음에 따라 다르게 와 닿습니다. 저는 오늘 유난히 ‘아버지’라는 첫 구절이 와 닿습니다. 언어적인 특성상 수식어가 먼저 오는 한글에서는 ‘하늘에 계신’으로 시작하지만, 서양 언어에서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먼저 나옵니다. 첫 한 단어로써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 전체의 의미를 함축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주님의 기도도 크게 어려운 기도가 아니지만, 그조차도 하기 어려울 때에는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만으로도 하느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자신의 창조주이자 구세주를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에서 이미 상호간의 ‘대화’를 전제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하느님 아버지는 나와 전혀 다른 차원 존재하면서 나를 만들고, 나의 운명을 결정하는 그러한 비-인격적인 절대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나와 같은 모습으로 당신 자신을 낮추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나의 아픔, 갈망, 마음을 헤아리고자 하신 분입니다. 한편 나는 자녀로서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은 당연하기에 아버지의 뜻을 먼저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버지가 원하는 것과 일치하도록 노력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하느님과 서로 통하는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성령의 은총을 청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 힘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아버지의 뜻이 나의 뜻이 되고, 나의 뜻이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청합니다.